나, 장자는 어느 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기분 좋게 날다보니 내가 장자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눈을 뜨니, 나는 다시 나 자신, 진짜 장자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장자가 나비로 변하는 꿈을 꾸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장자로 변하는 꿈을 꾸었을까? (p.273-4 호접몽 中 )
연극도, 영화도, 책을 읽는 순간도 끝난다.
이제, 그 속에서 느꼈던 나의 감정을 되돌아 볼 시간이다.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되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기억은 남아있다.
다시 현실에서 주인공이 처했던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놓였을 때,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현상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객관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던 나는 어차피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의 사고는 아예 백지상태였고 머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진행해가는 동안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였더라’하며 챕터의 제목으로 돌아가기를 거듭했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배우고 싶었다.
햄릿의 독백이 나오자 '와! 미쳤다!' 이 외마디와 함께 책을 탁!하고 덮어버렸다.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통해 나를 더욱 알게 되고, 결국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역설적이면서도 너무나 맞는 말이라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본문에서 저자는 문학작품을 읽는 행위가 독자의 자기인식을 돕는다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에 대해 가장 처음 인지했던 기억이 초등학교 시절인지 유치원 시절 쯤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한쪽 구석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던 나는 더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며 ‘왜 나를 떠났을까…’하는 생각에 눈물이 맺혔는데 불현듯 ‘나 연기 잘하네’하는 생각이 들며 소름이 끼쳤다.
평소에 신경 쓰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고, 떠올리지도 않았던 일인데 왜, 감상에 젖은 척하며 가짜 눈물을 흘리는지...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말에 독서카드 제도가 생기면서 경쟁심에 아무책이나 닥치는대로 읽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등장인물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뭔가로 찌르듯 심장이 아팠다. 그러고는 감정의 전이가 너무 잘 일어나는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나 왜 아프지?' '나 왜 눈물이 나지?'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린다'는 말이 있다.
가뜩이나 울고싶은데 내 눈물을 정당화해주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되게 고맙다.
마찬가지로 책은 울고 싶은 사람에게 핑계를 제공해준다. '책 내용이 슬퍼서'라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 울어도 된다.
울고싶었나보다, 그 때.
문학작품을 읽으며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문학작품이 '허구'라는 사실을 독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의의 거짓말,' '가짜뉴스,' '카톡형식의 어그로 책광고'와는 다르다. 독자는 알고 속아준다. 그리고 진실을 되찾는다. (수필, 에세이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653페이지에 나온 저자의 언급(‘우리가 고안한 경이’)처럼 우리가 경이를 고안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경이로움'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경이'라는 감정을 느낀 것이고, 그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끼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인간이 발전시켜 온 '문학'이 '경이'를 얼마나 더 자극하는지 발견하게 되었고 ‘경이'를 더 많이, 더 자주 느끼고 싶어서 '문학작품'에 주목해보는 것이다.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저자가 말하는 발명품이 '경이'라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경이'를 자극하는 '문학적 장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레처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런 장치가 많다고 해서 누구나 연민의 달인이 될 수는 없다.’(p.122)
인간은 유한하고 인간이 의도한 장치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영향을 내진 못한다는 사실은 전제로서 인정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가 좋아서 책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그런데 점점 어린시절과는 다르게 신경쓸 것들도 많아지고, 책을 읽는 것은 여유있는 사람들의 취미활동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대학을 결정할 때, 내가 좋아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국어책에서 본 시인, 소설가들은 대부분 굶어죽거나 폐병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을 봐서 조금은 멀리 하기로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점점 잠기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자기개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읽게 된 자기개발 에세이는 내가 뭐라도 하고 있는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책이라고 읽었는데 상쾌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이야기책을 읽기에는 '너는 지금 현실도피중이야'하는 주변 이야기가 듣기 싫었다. 그리고 문학은 현실과는 더욱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개 독자의 입장에서 출판시장과 한국의 독서문화를 이야기하기에는 주제넘은 면이 없지 않은 것같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문학이 실용서'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많은 것이 달라질 것같다.
서론에서 플레처는 그리스 비극의 상처지연과 카타르시스, 자기효능감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문학작품을 통한 정신 건강의 치유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이를 위한 도구로 마지막 부분인 코다(coda)에서 소피스트들의 기술과학적 방법을 제안한다.
이어 653페이지에서 퀸틸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당신의 글이 항상 진실일 필요는 없다. 그 글로 당신이 무얼하려는지가 중요하다."
진짜 그럴까?
물론 저자는 문학을 통한 치유를 염두에 두고 인용한 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하다.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글을 통한 심리 조작의 가능성도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산주의 문학가들은 '탈출기˚'와 같은 작품을 이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허구의 주인공이 가지는 분노에 공감하도록 하고, 이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행동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정치적 선택에 확신을 가지는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당시 공산주의를 선택한 사람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북녘에서 본인의 선택이 아닌 것을 이유로, 자유를 박탈당한 채 굶고, 추위에 떨며, 갇혀있다.
나쁜 정치꾼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는 누군가 의도를 담아 감정을 움직이는 글을 썼을 때, 그것이 자신의 똑똑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분석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읽는 눈'을 길렀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구체적인 방법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필요한 감정적 균형을 얻기 위해 특정한 책을 읽는 방법도 좋고, 누군가를 위해 그런 글을 쓰는 것도 의미있겠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는 재미있는 소설도 아니고, 감성을 적시는 시도 아니다. 심지어 두껍다. 그렇지만 당신의 글에 어떤 희망을 담을 수 있는지 알고싶다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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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기 - 임신한 상태에서 먹을 것이 없어 귤껍질을 몰래 베어먹던 어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주인공이 사회체제에 분노하며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해 떠난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 형식을 한 이야기. 전단지 같은 낱장으로 배포되었기 때문에 독자는 친구의 편지를 읽는 것처럼 느끼며 서술자의 분노에 공감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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